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라곤의 카탈리나 (문단 편집) === 외로운 죽음 === 일방적인 이혼과 폐위를 당해 궁에서 쫓겨나고 딸 메리와 생이별한 채 어렵게 지내다 [[수녀원]]에 들어가서 교회의 도움을 받으며 살게 되었고, 기도와 금식을 하며 종교 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수녀원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 향년 51세. 사후 캐서린의 시신을 부검한 부검의가 >"[[심장]]에 시커멓게 종양이 있었다." 라는 기록을 남겼다. 현대 의학 관점에서 보면 암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검게 변한 심장을 두고, "[[앤 불린]]이 캐서린을 독살한 거다", "캐서린이 자신을 버린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심장이 썩어 들어간 거다" 등의 소문이 돌았다. 캐서린은 생전에 신앙심이 깊고 예의바르며 가난한 백성에게 자선도 베푸는 등, 귀족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덕망이 높고 인기가 많은 왕비였기에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귀족들과 시종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캐서린은 죽기 전 편지를 남겨 조카 카를 5세에게 자신의 딸 메리를 돌봐달라고 했으며 [[헨리 8세]]에게도 >"[[보살|당신이 내게 저지른 모든 것을 용서하며]], 우리 딸 [[메리 1세|메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만이라도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라고 애끊는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그러나 헨리 8세는 마지막까지 비정하게 캐서린에게 오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게다가 헨리 8세는 메리가 어머니 캐서린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게 했고, 캐서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앤과 함께 축하의 뜻을 상징하는 노란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인간 말종|이게 사람인가?]]~~[* 농담이 아니고 [[조선]]시대에 [[헨리 8세]]와 비슷한 가정사를 가진 [[성종(조선)|성종]]과 [[숙종(조선)|숙종]]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성종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지만, 윤씨가 죽은 후에는 군관을 보내 장례를 돕게 했으며 나중에는 그 무덤을 '윤씨지묘' 라고 하여 이름붙이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게 할 정도로 최소한의 정성은 보여주었다. 숙종도 [[장희빈]]을 사약을 내려 죽이는 극단적인 수를 쓰긴 했지만, 장희빈의 장례는 [[왕비]]에 준한 예로 지내주었고, 아들 경종이 어머니 장희빈의 장례에 참석하게 해주었다. 물론 이 둘의 경우엔 자신이 죽인 여자가 [[연산군|세]][[경종(조선)|자]]의 생모라는 점이 걸려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한때는 아내이며 왕비였던 여자가 죽었는데 슬퍼하는 척조차 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으며 헨리 8세의 이기적이고 비정한 성격이 제대로 드러난다.] 심지어 앤은 캐서린의 사망 소식을 듣자 >"이제야 내가 진정한 왕비가 된 것" 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다녔다는 비화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왕비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신 역시 캐서린처럼 아들을 일찍 잃고 목이 달아난 게 함정~~[* 여담으로 앤 불린의 최후가 캐서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사실 앤이나 캐서린이나 헨리 8세에게 버려진 건 똑같이 아들을 못 낳았기에 통상적으로 보면 앤 불린도 목이 잘릴 이유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앤은 참수당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로 캐서린과 7년씩이나 지리한 공방을 벌인데다 거기다가 평소의 캐서린은 순종적이었기에 캐서린과는 달리 앤은 드센 성격이었기에 이혼 하느라 씨름하느니 그냥 목을 잘라야겠다고 생각한 헨리 8세의 판단 때문이란 시각도 있다.] 시신도 예를 갖추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하는 대신 피터버러 대성당에 안장했다. 한편 캐서린의 딸 [[메리 1세|메리]]는 어머니의 이런 아픔을 보고 자라며 졸지에 [[공주]] 지위를 상실하여 레이디 지위로 격하되어 [[사생아]]가 된 데다가 강제로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1세|엘리자베스]]의 [[시녀]]가 되는 수모를 당했고, 아버지 헨리 8세의 방해로 어머니를 보지도 못하고 편지조차 보내지 못하다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으며 장례식조차 가는 것마저 금지당했기 때문에 평생 아버지와 새어머니 [[앤 불린]]을 매우 증오했다.[* 처음에는 앤 불린도 그래도 공주라고 메리에게 자신을 잉글랜드의 왕비로 인정해달라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지만, 누구 때문에 어머니가 그 꼴이 되었는지 알고 있던 메리가 거절하자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만들어버리고 시종과 결혼시켜 버리겠다며 협박했다.] 덧붙여 이 때문에 메리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 1세|엘리자베스]]를 싫어하고 경계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자매의 사이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선 엇갈리는 이야기가 있어서 확실하진 않다. 메리가 엘리자베스에게 느낀 건 애증이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많다. 확실한 건 메리가 즉위한 후엔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 탓에 엘리자베스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유일한 피붙이이며 자식이 없는 자신의 후계자이기도 해서 엘리자베스를 빌미로 수많은 반역 모의가 있었는데도, 메리가 엘리자베스를 처형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설사 미워했더라도 죽일 정도로 미워하진 않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특히 메리는 상당히 정이 많고 무른 면이 있었기 때문에, 이복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애정과 미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가졌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 [[한국사]]에 비유하면 [[경종(조선)|경종]]과 [[영조]]의 관계와 유사하다. ~~미워도 한 가족~~ 캐서린은 순종적이지만 고집이 강한 성격으로, 6년이라는 긴 이혼 재판 기간 동안 자신이 진정한 [[잉글랜드]]의 [[왕비]]라는 것을 주장했고, 앤 불린이 잉글랜드의 왕비로 즉위한 뒤에도 자신의 모든 문서 서명을 '''Katherine the quene'''[* 고어 표현으로 당시엔 여왕 또는 왕비를 나타내던 queen의 표기법이 quene이었다.]으로 했다.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킬 수 없었던 딸 [[메리 1세]]는 어머니가 묻힌 옆에 묻히길 원하지만, 결국 그 꿈은 이뤄지지 못한다. 대신 [[엘리자베스 1세|메리의 옆자리는...]] [[메리 1세]] 항목 참조. 여러모로 조선시대의 [[인현왕후]]와 비슷하다. 남편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본인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쫓겨나고, 민중들의 동정을 받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게 공통점. 그 외에도 왕인 남편에게 순종적이었지만 의외로 자신의 신념으로 버티는 뚝심 하나는 제법 있었다는 점. 몸이 병약했다는 점도 같다. ~~그래도 인현왕후는 한때나마 복위라도 했지만~~[* 인현왕후는 복위는 됐지만 몸이 너무 병약했던 탓에 다시 왕비가 된 메리트라고는 사실상 느껴보지도 못한 채로 고통스럽게 죽었다. 원래부터 튼튼한 몸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남편에게 박대당한 것과 유배 생활로 몸이 더 망가져 버린 것. 그래도 복위되어 7년은 살았다. 34세로 단명해서 그리 행복한 최후는 아니었겠지만.] 다만 캐서린은 자녀를 둘이나 낳았고 그 자녀 중 [[메리 1세|하나]]가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인현왕후는 숙종과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다는 것이 차이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